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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 성령의 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의 시대 우리가 살고있는 신약시대는 보혜사 성령시대입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법이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 롬8:2) 무엇인지 밝히 알아야 올바르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법을 학습하고 지켜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가 우리를 무엇에서 자유롭게 할까요?
예, 바로 우리 인간을 영벌로 정죄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과 613조의 율법을 준행해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신약시대에서는 영적 이스라엘 민족인 우리 그리스도의 성도들이 십계명을 지켜야 하고 구약의 613 조의 율법은 폐하여졌으나 그대신 (롬8:2)에 기록된 성령의 법을 준수하여야 영혼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1:17), 울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빌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현재 전 세계의 기독교가 참다운 진리에 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많은 신자들이 성령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알지 못하는 성도, 저 스스로 예수 믿는다고는 하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없이 저 혼자 홀로 다니며 과부와 사생아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인(고후11:2) 예수의 영이 없으니 과부이고 아버지의 영이(갈4:6) 없으니 고아인 것입니다.
(사54:1)에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손을 들어 따먹고 하나님의 법을 어겨 범죄한 이후로 성령은 없이 육체와 혼 그리고 인간의 영만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야 그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떠난 하나님의 영을 다시 우리 사람들에게 돌아올 수 있게 하나 하는 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던 그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즉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 인간으로부터 떠난 성령이 어떻게 해야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 올 수 있나 하는 하나님의 인류구원 사역의 지식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일반 일요일 교회에서도 성령을 많이 강조하지요.
그러나 그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활동을 하시는지 거의 모든 예수교 신자들이 그 성령의 법칙을 모르니 도무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기독교는 뱀들의 속임수로 다들 속아서 하나님의 법이(사1:10, 롬7:25) 무엇인지 그 성령의 법이(롬8:2) 무엇인지 도무지 교인들이 알지를 못하니 저 시날땅 바벨론성 안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진리가 아닌 사람들의 소리로 저마다 제각각 언어혼잡(babel)을 일으키며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수도 없이 변질되고 변형되어 이 사람 저 사람 제멋대로 가감하여 그럴듯하게 짜집기하여서 일요일마다 강대상 단에 서서 진리와 비진리가 마구 섞인 저들이 스스로 만든 엉터리 설교들로 언어혼잡(babel)을 일으키면서 기독교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신)이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은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 (창1:2)(개혁개정)
여호와의 영(the spirit of the Lord)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11:2)
그러면 다윗이 성령(Holy Spirit)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22:43).
또 주의 종 우리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행4:25).
위에서 열거한 구절들을 보니 여호와의 영(the Spirit of the Lord)과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그리고 성령(Holy Spirit)은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인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 여호와의 영은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영(롬8:9) 하나님의 영(롬8:14, 고전6:11,8:40,12:12, 고후3:3)과 같은 분(존재)으로서 곧 신약의 성령(Holy Spirit)과 동일한 분이지요.
그 성령이 구약의 하나님의 영이고 여호와의 영이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과 동일한 분인 것입니다
성령이란 탄생 전 예수이신 구약의 여호와이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이란 예수께서 승천하신후 재림하시어 세상심판 때까지 보혜사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천지창조를 하신 유일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령에 관한 지식은 개신교 신자들이면 보편적으로 다 아는 지식이지요?
성령 모독죄는 영원히 사함을 못받는다.
사실은 성령에 관하여는 글쓰는 자체도 상당히 두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blasphemy) 영원히 사함을 못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마12:31-32)에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막3:28-29)에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눅12:10)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함이 없으므로 우리가 함부로 성령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거나 가르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성령의 법도 모르면서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다고 가르치고 아무 때나 성령 충만하다고들 흔히 말하는데 그러한 잘못된 하나님의 지식을 경계하고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지 우리가 밝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어떠한 죄가 어떤 행위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못받는 것인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목사들 자신들이 알아야 하고 또 교인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참! 생각해보내 염려할 필요가 없겠네요.
저 삯꾼목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니 성령훼방죄도 범할 일이 없겠네요.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영원히 사함을 못받는다 하였으니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죄를 절대로 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 삯꾼목자들이 성령의 법을 모르니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저희 자신들도 망하고 수도 없이 많은 양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는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또 “한번 예수 믿기 시작한 신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을 한다” 그리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만든 영적 거짓말로 이 기독교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누룩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행위가 (마23:13-15)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이 전세계 방방곡곡 사방으로 휘젓고 다니며 교인수자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걸린 교인들은 그 바리새인들 보다도 배나 지옥자식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갈 수 없다.
(요3:5)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보니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였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을 받고 천국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어떻게 해야 받는 것인가?
성령을 받고 아니받고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며 또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또 성령을 받은 본인은 어떠한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흔히들 말하기를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예배를 보고 나면 성령이 충만해진다 하고 복음성가를 장시간 여럿이서 부르면 성령을 많이 받았다고들 하지요.
그러한 행위들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흔히 교회 목사들이 말하기를 어느 누구든지 예수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성령이 그 사람에게 들어오고 또 초신자들은 교회 문턱을 넘으면서 성령은 이미 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 모든 죄 다 사함 받고 축복 받아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여진다고 (요일1:2)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흔히 목사들이 설교하기를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 받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롬10:10)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구원을 받고 (롬10:13) 그 즉시로 성령이 그 사람에게 들어온다고 목사들이 가르치지요?
과연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결심하면 그 즉시로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까?
그렇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요?
예수 믿을 때 성령 받는다는 사탄(뱀)의 거짓말
목사들이 흔히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은 아무런 체험도 없고 확신도 없이 목사들이 말하기를 성령을 받았다고 하니 받았나 보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냥 아무런 특이한 현상도 없이 맨송맨송하니 본인 스스로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고 확신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말에 속으면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 받을 길이 영영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회개하고 성령을 따로 또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죽을 때 까지 성령과 동행함이 없는 신앙생활 하면서 남편 없는 여인(사54:1) 으로 열심히 예수 믿다가 몸이 죽자마자 영원한 멸망과 형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 받을 때 반드시 하여야 하는 회개기도를 하지 않으니 어찌 성령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흔히들 예수 믿을 때 성령 받았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성서적이 아닌 뱀들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아래의 구절들을 유심히 읽어 보세요.
(행18:24-25)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이 구절에서 보듯이 아볼로는 성경에 도통한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급 성도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성경에 능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자이나 요한의 세례만(물세례) 알 따름이라 하였습니다.
(행18:26)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들 데려다가 주의 도를 더 자세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성령세례에 관하여는 전혀 모른 사람이었습니다.
(행19:1-7)에,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이 구절들에서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으니 그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그들이 대답하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세례를 받고 바울이 안수하니 방언도 하고 예언(말씀 대언)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분명 예수 믿는 과정과 성령 받는 과정이 따로 있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분명히 그 열두 성도들이 예수는 믿었으나 성령은 받지 못하였다고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8:12, 14-16),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라.
위에 있는 구절에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이 전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믿고 주 예수이름으로 세례를(물세례) 받았으나 아직 한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바로 자동으로 성령 받는 것이 아닌 것이 명백하게 들어났습니다.
그러니 개신교 목사들이 가르치는 “예수 믿을 때 성령 받는다” 는 교리와 설교가 비성서적이요 비진리이고 저희들 스스로 만들어낸 새빨간 사탄의 뱀의 바리새인의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행19:2-6)에서 보니 예수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니 그사람들이 무어라고 대답했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성령은 따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행19:5-6)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했습니다. (요3:6)
그런데 (행 19:2)를 보니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예, 바로 이 부분에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탄의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 가는데 예수 믿는다고 자동으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성령을 받을 수 있는가?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야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과정이 있는데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을 받는 과정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령이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 오시지 않습니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구절에서 밝히 들어나기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은 후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했습니다.
(행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행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눅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고후7:10),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깨달아 심령을 새롭게 하여 옛 사람의 모든 악업과 악습에서 돌이켜 죄악의 옛 사람은 죽고 구원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란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에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한 신앙생활을 못하였던 죄, 하나님 법을 몰랐던 죄, 알게모르게 지었던 모는 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람들에게 행하였던 모든 영적육적의 과오와 실수와 잘못을 참회하고 개과천선하여서 남은 생애는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잘 섦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잘 지키며 성경의 하나님 말씀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진심를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결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세월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이 그 사람에게 들어와 죄악의 옛 사람은 죽고 성령 받은 하늘나라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새 예루살렘이(계21:2)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분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단 냄새가 솔솔 나는데 라고 하겠지요.
죄사함 받지 못하여 죄가 여전히 있는 더러운 영의 사람에게는 성령이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죄사함 받고 죄 없다는 칭의를 (稱義-롬3:24) 받은 죄 없는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의 영혼에만 성령께서 들어 오시어 임재하시는(Presence)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예수의 분영(分靈)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임재(Presence)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 몸과 영혼 속에서 우리와 같이 동행하시며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아담의 원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없이 육체와 혼과 사람의 영만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들에게 그 생기를(창2:7, breath) 우리의 심령의 코에 불어 넣으시어 성령을 받게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인생들을 다시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같은 고귀한 영적 존재로 회복시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것이 첫째 부활(계20:6)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게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회개하고 죄사함 받으면 그 죄 없는 깨끗하고 거룩한 심령에 들어오시어 예수께서 임재하시며 (Presence) 영적으로 죽어 있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 부활이고(계20:5-6) 그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하늘에 있는 본향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6)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 (고전5:1)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 이후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거할 곳은 분명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들이 사는 세계 영생복락의 하늘나라를 말하지요.
거기에는 더웁고 추운 것이 없으며 영원히 늙지도 않고 음식을 먹어도 되고 안먹어도 되는 시공간을 초월한 천사들과 같은 영광의 고귀한 존재로 변하여 하나님과 같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가장 큰 목적과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 복받아 건강하고 범사에 형통하려고 믿습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알고 믿고 있지요.
특히 순복음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요?
순복음교회 교인들은 세상복에 마음이 취해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육간에 하나님 복 받을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 목표는 우리의 몸과 영혼이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늘나라에 가야 하는데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7:10)를 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인치심을(엡1:13)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회개하여 성령을 받고 (계7:2-4)의 하나님의 인을 맞고 십사만사천인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약시대 즉 보혜사 성령시대에 사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성령의 법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서 올바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기도 하고 죄사함 받아야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4:17), 예수께서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세례요한도 회개하라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운 것입니다.
저 옛날 태초에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뱀의 거짓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불법을 행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신학세계에서 흔히들 말하기를 그때의 가죽옷은 우리 인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요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요 진리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고 죄지은 아담과 하와가 회개도 하지 아니했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일까요?
회개가 없으면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으면 성령세례가 없는데 성령을 못받으면 구원이(가죽옷) 없는데.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심히 부끄러워서 그 죄지은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옷을 해서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에 심히 두려워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옷을 지어 입은 행위가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그때에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들어 입는 옷은 몸 전체를 가리는 긴 외투와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신학세계에서 흔히들 그 때의 무화과 나무 잎사귀 옷이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가 되는 인간의 잘못된 어리석은 생각과 지혜들이라고 목사들이 가르치는데 그와 정 반대로 오히려 그 진정한 참뜻은 아담과 하와의 회개였던 것입니다.
(겔 47:12)에 잎사귀는 약재료라 하였습니다.
(계 22:2)에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와 같이 잎사귀는 치료하는 약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호6:7) 타락하고 병든 몸과 영혼을 회개기도 하는 약으로 덮어 하나님의 죄사함을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소위 신학세계에서 아무도 풀지 못하는 3대 의문의 하나가 가인의 표라 합니다.
(창4:15)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그 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회개하는 가인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의 표를 주신 것입니다.
가인이 회개를 하여도 아주 간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이 중벌을 내려 저주하였을 때에 가인이 하나님께 호소를 하였습니다.
(창4:13-14)에,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성경에는 한두 구절 간략하게 기록이 되어 있으나 가인이 회개할 때에 그의 죄가 너무 중하니 양심의 가책을 받아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인이 회개하고 나서 얼마나 겸손하여졌는지 (창4:17)에서 가인이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면서 성(city)을 쌓았는데 그 성의 이름도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아니하고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위 구절 (창4:13)의 히브리 원어를 보면 내 죄벌이 히브리어로 “avon“인데 그뜻이 죄(罪)입니다. 벌(罰)이 아니라 죄(罪)입니다. 영어로 sin, iniquity이란 뜻입니다.
히브리 원어에서 번역을 잘 못한 것입니다.
참고로 오역을 잘 설명해주는 사이트를 아래 Link에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My punishment עֲוֺנִ֖י (‘ă·wō·nî) weblink
And Cain said to the Lord, “Is my iniquity too great to bear?
יגוַיֹּ֥אמֶר קַ֖יִן אֶל־יְהֹוָ֑ה גָּד֥וֹל עֲוֹנִ֖י מִנְּשֽׂוֹא:
Most translations have “my punishment is greater than I can bear” for the end of Genesis 4:13.
The Hebrew word translated as “punishment” is “avon,” which means “iniquity” (or, more correctly, crookedness from an Hebraic perspective).
This same word is used hundreds of other times where it is correctly translated as “iniquity.”
The literal rendering of Genesis 4:13 is “great is the burden of my iniquity,” the opposite of how it is generally translated.
성경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표는 세 개가 있습니다.
가인의 표와 (겔9:4)의 탄식하며 우는 자에게 주는 표와 (계7:3-4)의 구원 받은 144,000인의 이마에 인 맞은 표인데 다 하나님의 구원의 표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인과 같이 회개하고 구원의 표를 받아야지 (계16:2)의 짐승의 표, 바벨론의 음녀인 천주교의 표를 받으면 아니되겠습니다.
니므롯의 태양신, 바알신의 표를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일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유1:11)에,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그러면 또 많은 분들이 위 구절들과 같이 가인은 악한 자의 상징이고 대명사인데 무슨 헛소리 하는 것인가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악인의 상징같은 가인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의 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세례 받고 구원의 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엡1:13) 구원의 표를 받고 십 사만 사천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성도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고전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롬 8:9)에, 그리스도의 영(Spirit)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
이 구절들에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들 심령에 성령은 없고 그들이 믿는 신앙생활에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도 없는데 “주여 주여” 하며 기도하고 주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보았자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헛믿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셨고.
(마 7:22-23)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성령이 무엇인지 모르니 저희들끼리 매주 모여서 성경공부 하면서 성경의 교훈으로 인간의 철학으로 윤리나 도덕으로 가르치며 생명(성령) 없는 종교를 만들어 내어 저희들끼리 서로 붙어서 남편 없는 과부, 아비 없는 고아가 되어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인(고후11:2)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니 과부이고 아버지의 영이(갈4:6) 없으니 고아인 것입니다.
성령의 동행함이 없는 신앙생활, 그러한 신앙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성령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성령(예수의 영)의 역사 없이 성경구절의 교훈으로 신앙을 삼아 열심히 선하고 바르게 살겠다고 노력하는 자들.
성령의 임재함 없이 성경말씀과 인류의 도덕과 교훈과 선행의 가르침으로 교리를 삼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그러한 신앙이 바로 바리새인 신앙이며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목사들의 설교를 보십시요 성경구절들을 줄줄줄 외우고 인용해 가며 말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설득력 있고 구수하게 청산유수로 얼마나 잘 합니까?
우리 보혜사 성령시대에는 성령이 각 성도에게 임재하고 역사함으로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영혼구원을 이루는 성령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알지도 못하는 사생아들 끼리 모여서 예배 드리고 설교 듣고 찬송가 부르고 교제하며 밥 먹고 즐거워하며 한 공동체로서 웃고 떠들며 신앙생활, 사회생활 하면서 자기만족을 채우는 것입니다.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나가서 바알에게 무릎 꿇고 바알에게 입맞추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없어 생명이 없고 부활이 없는 엉터리 예수교는 경전의 교훈과 도덕과 선행을 가르치는 유교, 불교, 도교등의 이방종교와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서 성령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야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Lord)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성령을 받는다.
(창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고전4: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위 구절들의 자식을 낳는다는 영적 의미는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죄악의 옛 사람은 죽고 성령 받은 새 사람이 출생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여인네들이 실제로 자식을 출산할 때에 많은 산고를 치루지 않습니까?
영적 출산도 그와 같은 수고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는 것이 회개하는 노력과 수고 없이 그리 쉽게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뼈를 깎는 자기의 반성과 결심을 요구하는 것으로 회개기도 하는 과정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사람에 따라 각각 다 다릅니다.
그 회개기도의 과정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회개기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금방 몇 분만에 죄사함 받고 성령 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몇 시간이 어떤 사람들은 몇 일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몇 개월의 오랜 기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그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죄없다고 칭의(롬5:9) 하시는 과정이 사람에 따라 각각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을 찢는 통회하는 마음과 회개기도 없이 그냥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줄 아십니까?
마음으로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 즉시 성령 받는다고 목사들이 가르치지요?
그러니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거짓교리에 신자들이 망하는 것을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나팔재앙(계8:2)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반문하기를 우리가 마음속으로 예수 믿을려고 결심할 때 이미 성령은 받았는데 무슨 성령을 또 받으라 하는가.
이단 종파들이 하는 말 아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을 때에 우리들의 죄는 이미 다 사해 주셨다는데 왜 회개기도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는 이미 다 사함을 받았으며, 만일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요3: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
위와 같은 구절들이 있는데 왜 회개기도라는 절차가 필요하며 죄사함을 다시 받아야 하고 왜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가득할 것입니다.
사탄이 바로 위와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며 성령 받고 천국 가려고 하는 성도들을 비진리로 거짓 복음으로 유인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는데 그 보혈의 죄사함은 우리가 예수 믿기 시작할 때 바로 자동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할 때 주시는 것입니다.
(행8:12, 14-16),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위의 구절들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요.
사탄이 그의 하수인인 거짓 목자들을 동원하여 거짓 복음으로 요한계시록 8장에 나오는 나팔재앙으로 인류를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그 사탄의 하수인들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꾸짓으셨던 독사의 무리들 바리새인들이지요? (마23:33)
그 가증한 바리새인들은 우리시대에 누구를 지칭합니까?
바로 일요일마다 강단 위에서 거짓 교리로 설교하는 목사들, 거짓 목자들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입으로 쏟아내어 나팔재앙으로(계8:6-12) 인류를 멸망케하는 독사의 무리들을 말합니다.
회개하고 성령 받아야 비로소 천국백성이 되는데 예수 믿을 때 이미 성령 받았다고 뱀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니 그렇게 믿고 있는 신자들은 성령을 받을 기회는 영원히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조사하고 연구해 보세요.
나팔 부는 것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사58:1)에서 목사들이 복음 전하는 소리라고 하였지요.
(계9:13-19)에서 보면 나팔을 불 때에 유브라데스강에 결박해 있던 있던 4 마귀 천사를 풀어주었는데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러 나오는데 이만 만이요, 즉 그 수가 2억 명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와서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는데 그 말들의 힘이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며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그것으로 해하였다고 했습니다.
(사9:15)의 꼬리는 거짓 선지자이고 머리는 장로들을 영적으로 의미합니다.
가증한 바리새인들, 독사의 자식들, 거짓 선지자들의 나팔재앙에 망하지 마시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유황불, 거짓말에 속지 마십시요.
그러니 그러한 엄숙한 회개기도의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예수 믿을 때 이미 자동적으로 성령 받았다고 하는 자체가 바리새인들의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또 많은 사람들이 반문하기를 예수님의 11제자들은 그러한 회개과정이 없었는데 예수께서 (요20:22)에서 숨을 내쉬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인가?
사도행전에서 보면 회개하였다고 하는 구절들도 없는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요13:10)에서 예수께서 11제자들에게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벌써 다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정결한 자들이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사도들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다 이미 그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위 구절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은 선물이고 성령은 생명 얻는 회개하고 하였습니다.
방언이 성령과 뗄 수없는 관계인 것처럼 회개도 성령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성령 모독죄 – 성령 받은 후에는 더욱더 깨어 기도하며 조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령 받은 이후에는 더욱더 조심하여 죄짓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성도가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면 영원히 사함을 못받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아직 받기 전에 지은 죄는 어떠한 죄도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시나 성도가 성령 받은 후 지은 죄는 영원히 사함을 못받는 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눅12:10).
둘째는 니콜라처럼 (계2:6, 15) 당을 짓고 12사도복음에서 나가서 적그리스도(요일2:18-19)가 되는 죄.
셋째는 알면서 자꾸 되풀이하며 범하는 짐짓 지는 죄(히6:4-8) (willful sin)입니다.
(히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냐.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후6: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말할 수 없이 거룩한 존재입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니 죄가 없어 정결하고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니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존재입니까?
그러한 고귀하고 거룩한 자기 자신이 예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것을 망각하고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모독하면서 죄를 범하면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어 영원히 사함을 못받는 것입니다.
(히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 한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죄를 범한즉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하는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자의 당연히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벧후2:20-21), 우리주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요일4:13)에서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으며.
그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이 우리와 동행하신다(walk)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일5:16-17)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일5: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pray)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히12:16-17),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장자였는데 팟죽 한 그릇에 그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영적으로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 받은 성도의 이마에 인 맞은 표를 (계7:3-4) 영적으로 상징합니다.
에서는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팟죽 한그릇에 팔아먹었습니다.
성령모독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회개하여 성령을 받으면 첫째 부활이고 그 성령이 하늘나라의 상속권입니다.
그러한 성령을 팟죽 한 그릇, 즉 세상의 재물과 염려에 팔아 치운 에서는 성령모독죄를 범하여 그후에 저가 수없이 많이 회개하였으나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약시대에도 성령을 받은 성도가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을 무시하고 에서와 같이 세상의 탐욕과 음욕에,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눈이 어두어져 하늘나라 상속권을 팔아먹거나 니콜라(행6:5, 계2:6) 같이 사도들의 복음에서 나와서 ‘사도복음’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되면 (요일 2:18-19)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여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 하였을 때에는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사함 받을 수 있고 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열려있습니다 (OPEN).
그러나 일단 사람이 한번 성령 받은 이후로는 아주 조심하여야 합니다.
성령 모독 죄나 짐짓진 죄 같은 사함을 못 받는 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할 수 있는 제사나 기도가 없기 때문에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완전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2:2)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가 (벧후2:20-21)에서 “의의 도를 안 후에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하였으며
사도 요한이 (요일5:16)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구하라’는 뜻은 그리이스어 원문에서는 ‘기도하라’ pray 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일도 해산의 고통이 따라야 하지만 (창3:16, 요16:21, 계12:2, 갈4:19, 미4:10).
그 해산의 고통을 겪어가며 어렵게 받은 성령을 에서와 같이 망령되이 버리면 영원히 사함을 못받음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까지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빌2:5) 가지고 성령의 법을 (롬8:2)따라 무한히 노력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나 바울처럼 무한히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완전한 의인도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죄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 것입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내가 내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고전9:27).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성령 모독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이며 (마7:23)의 불법을 행한 죄 중에서 제일 큰 죄입니다.
불법: anomian – ἀνομίαν – lawlessness (Weblink)
칼빈의 예정론은 비성경적인 사탄의 거짓말
칼빈 신학 중에서 예정론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뱀의 거짓말 즉 선악과입니다.
하와를 속인 뱀의 거짓말과 똑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선악과를 먹으면 영원히 구원에서 멀어져 멸망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올바른 하나님의 교리라면 바울이 왜 자기 자신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했습니까?
칼빈의 예정론, 성도의 견인과 이중 예정론의 신학이 성경의 말씀과는 완전히 위배되는 사탄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위에서 열거한 여러 구절들에서 명확히 들어났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예정론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구절들을 칼빈 신봉자들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사탄이 “칼빈”이란 큰 왕(王)뱀을 하나 양성해서 수천 만명의 장로교 교인들을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장로교회 교인들만이 아니고 다른 교파들의 수많은 수억명의 영혼들이 칼빈의 예정론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Arminius 의 신학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아르미니우스의 구원론이 성서적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5번째 강령: 믿는 자라고 모두 확실히 견인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부터 타락할 가능성도 있다.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
한번 성령을 받고 영혼구원을 받은 성도는 그 자신이 성경말씀대로 죄짓지 않고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상태가 유지가 되고 안되고가 판가름 난다는 뜻입니다.
그에 반하여 칼빈의 예정설은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한 구원이라 주장합니다.
아무리 악하고 더럽게 살아도 구원을 받는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잃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의 내용과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입니다. 칼빈의 예정론 5번째 강령 – 성도의 견인.
그러면 하나님이 니콜라는 왜 견인(堅忍)을 안했습니까?
성령이 충만 했던(행6:5) 니콜라가 적그리스도가 되어(계2:6, 15)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팔아먹은 제자 가롯유다는 또 어떻습니까?
당시에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수백명도 넘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특별히 12 사람을 구별하여 제자를 삼을 때에 가롯유다도 심령이 깨끗하고 믿음이 충만하니 제자를 삼은 것 아닙니까?
그러한 가롯유다는 왜 성도의 견인을 못받았을까요?
구약에서 초대 이스라엘 왕 사울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울왕이(삼상10:10, 11:6) 왜 하나님의 “성도의 견인”을 못받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영원히 멸망하였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한 에서는 (히12:16-17) 왜 하나님이 죄사함 받는 기회를 안 주셨나요?
강하게 참고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께서 왜 에서에게 그렇게 가혹하셨나요?
왜 하나님이 에서에게는 성도의 견인을 안하셨나요?
칼빈의 예정론 신봉자들이여 해명을 해 보세요.
위에서 언급한 두사람과 같이 성도의 견인을 못받고 믿음에서 버림을 받고 구원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이 성경안에 많이 기록이 되있습니다.
(딤전1:19-20)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딤전4:1-2)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5:15)에,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딤후2:16-18)에,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3:4-8)에,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딤후4:10)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와 같이 칼빈의 예정설은 성경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 이론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지게되고 논리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堅忍);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성도가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질 수 없다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
하나님 주권의 절대성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성도견인의 교리에 따라 한번 구원 받은 성도는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
“성도구원의 영원한 보장” 즉 성도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결코 중도에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예정론의 성도의 견인이란 어느 구원 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그 성도를 구원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참고 사랑과 인내로 그 성도를 견고하게 붙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영향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이론이 성경말씀의 이론과 부합이 됩니까?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칼빈의 예정론이 진리라면 사도바울이 왜 우리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라 했습니까?
성도의 견인이 있는데 우리 성도들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떨리겠습니까?
이러한 칼빈의 이론이 성경의 이론과 부합이 됩니까?
장로교가 주장하는 칼빈의 예정설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다.
예수를 한번 믿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칼빈의 예정설은 성경과 정반대가 되는 사람들이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그러한 신학은 비진리이고 다 비성서적이며 사람이 만들어낸 인학(人學)입니다.
그러한 교리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바람일 뿐입니다.
그 칼빈의 ‘예정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이 위의 구절들에서 밝히 들어났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칼빈의 예정론에서 주장하는 “성도의 견인”.
아! 이 얼마나 듣기에 좋은 소리인가?
귀가 솔깃하지요?
얼마나 우리 마음을 뿌듯하게 하고 가슴 벅차게 하며 감동을 주는 교리인가?
이 얼마나 좋으시고 고마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평일날에는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일요일에 교회 나가서 예배 한 번 보고 기도 한 번 하면 예수께서 모든 죄 다 사해주시는데.
앞으로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이미 다 땡겨서 미리 사해 주셨는데.
“성도의 견인“, 즉 한번 구원 받기로 만세 전에 예정된 사람은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시작한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몹쓸 죄를 지어도 어떠한 더럽고 악한 삶을 살아도 다 용서하시고 반드시 죽기 전까지 구원을 하신다는 하나님의 그 신실한 약속.
아! 참말로 사랑이 차고 넘치는 종교 아닙니까?
그러한 칼빈의 조직신학이 정말로 우리 마음을 한없이 뿌듯하게 하고 선민의식을 느끼게 하여 감사와 찬송이 우리 마음에서 절로 나오게 하지 않습니까?
정말 좋으시고 너그러우신 하나님 아니신가.
사랑의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Islam 교의 Allah 신은 무섭고 잔인한 신이라는데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아니신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 아니겠나.
우리를 기분 좋게 하고 자신감 넘치게 하는 교리 아닙니까?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칼빈의 예정론이 선악과의 나무처럼 여러분이 보기에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스러운 예정론을 손을 들어 따먹으면 여러분의 영혼은 그 달콤한 선악과에 취해서 세월 가는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예수께서 정죄하시기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다 내게서 물러가라” 는 명령을 받고 어두운데로 내어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Calvin” 이라는 거짓 선지자, 거물 왕뱀에게 속아서 신세 망치고 지옥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되니 얼마나 분하고 원통하겠습니까?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지요.
영원한 형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을 범하고 죄와 사망의 법을 지켰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행한 불법은 십계명을 범한죄, 성령을 받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주장한 죄 그리고 성령을 법을 어기고 사함 못받는 죄를 지은죄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안식일 교파의 엘렌 지 화이트 그리고 여호와 증인의 “무지옥설”이나 다름없는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참고로 안식일을 성일로 지키는 교파가 500개도 더 되는데 그 중에는 침례교, 오순절교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을 지키는 한두 교파를 제외하고는 모든 안식일 교파들이 다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교파들 중 유일하게 지옥이 있다고 가르치는 교파가 중국에서 창시한 “참예수교회”입니다.
성경에 많은 부분에서 지옥에 관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
예수께서 직접 지옥에 대하여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많은 구절들을 다 부인하고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엘렌지 화이트”의 안식일 교파의 비진리 신학과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 모독죄를 부인하는 장로교회의 예정설과 같지 않습니끼?
위에서 열거한 사함 못받는 죄들에 관한 성경의 많은 구절들을 다 부정하고 만세 전에 예정된 사람은 무조건 구원 받는다는 칼빈의 예정설은 칼빈이 만들어낸 사람의 이론이지 하나님의 이론이 아닙니다.
진리는 성경에 쓰여있는 하나님의 이론일 때 진리이지 사람의 이론은 비진리이고 뱀의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하와를 속인 뱀과 똑같은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는데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칼빈의 예정설이 하와를 속인 뱀의 거짓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겔18:24)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히10:26-27)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의인이 범죄하면 죽는다는 성경상의 구절들이 위 구절들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항상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지키는 신앙을 예정설이라는 거짓말로 속이는 사탄의 선악과를 먹으면 안되겠지요.
만약에 사도바울도 니콜라처럼 (행6:5, 계2:15) 적그리스도가 되었다면 그것도 만세 전에 예정된 것이라고 저 칼빈 주의자들은 주장할 것입니다.
각 사람의 구원은 각 사람 자신이 스스로 지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입니다.
(출32:33)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기독교 신앙이 칼빈신학처럼 그렇게 쉽고 안일한 종교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칼빈의 구원론은 그 교리와 반대되는 많은 성경의 구절들에 관하여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절들을 언급하면 칼빈의 예정론은 논리적으로 전혀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칼빈의 예정론은 성령 모독죄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비성서적인 사람이 만든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이 두서너 가지의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며 예정설을 주장합니다.
(렘1:5)에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택하여 선지자로 예정했다.
(롬9:10-12)에 리브가가 임신 했을 때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으며 에서가 야곱을 섬기리라.
위의 두 절들에서 말하는 내용은 각 사람의 구원론에 관한 예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예정했다는 사역적인 예언이고 에서의 후손들이 야곱의 후손들을 섬긴다는 두민족의 후손들의 장래 운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실제로 살아 생전에 에서라는 사람이 야곱을 상전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에서에게 (창33:3)에 일곱 번 땅에 굽히고 절하였습니다.
에서도 장자의 상속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지만 않았어도 자신의 영혼구원에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가 망령된 행위로 저 스스로 성령모독죄를 범하고 멸망한 것이지 하나님이 에서의 운명을 미리 정하여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으라 말했습니까?
장자의 상속권을 팔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에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장자의 명분을 하찮게 여기고 판죽 한 그룻에 팔은 것 아닙니까?
에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 아닙니까?
(열왕13:9-26)에 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떡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사자에게 찟겨 죽임을 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면 선지자로 택함 받은 자도 멸망을 하는 것입니다.
(왕상20:35-35)에 한 선지자가 다른 선지자를 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자기 동료를 때리지 않은 그 선지자는 사자에게 찟겨 죽는 내용의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선지자로 택함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인간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에게 내렸더라도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지자로 택함을 받고 임명된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 죄를 범하면 그들의 영혼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구원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사람 스스로의 행동에 따라 자기 자신의 운명을 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구원 받은 상태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심령을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죄짓지 않으려고 무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롬7:25) 지키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갈5:22) 맺으려고 성령 받기 이전의 모든 탐욕과 음욕을 다 버리고 옛사람의 (엡4:2) 모든 악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계명과 성령의 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많은 분들이 “그래도 나는 칼빈의 예정설을 믿는다 그것이 더 마음에 들고 쉬우니 나는 칼빈의 신학을 신뢰한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 훼방죄와 사함 못받는 죄에 관하여 알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힘들고 두려운 신앙을 갖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믿으십시요.
신앙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강요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로만 하시었지 강제로 먹지 못하게 하시지는 안했습니다.
우리가 에스겔서의 여러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칼빈의 예정설은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겔18:24)에, 만일 의인(義人)이 그 의(義)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나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대표적인 예로 니콜라를 들 수가 있습니다.
(행6:5)에 성령이 충만한 선지자 일곱 집사 증에 한 사람인 니콜라가 나중에 변질되어 적그리스도가 (계2:15) 됩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바르게 예수를 잘 믿다가 타락하여 지옥 가는 교인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히 알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항상 현재가 중요한 것이지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래는 불확실하지요.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 우리의 현재 신앙을 굳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의 가르침을 벗어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교리를 가지고 제멋대로 제입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사설(私設)이나 지껄이는 것이 바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서 담 넘어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엄청나게 중요한 성령의 법칙을 깨달아 인지해야 하고 또 교인들에게 가르쳐야하는데 저희 자신들도 성령의 법이 도데체 무엇인지 모르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마23:14)에서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의 앞잡이 칼빈 신학자가 만들어 낸 거짓 교리 “예정설”에서 인용하며 예정설을 주장하는 성경구절들이 몇개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 관하여는 나중에 다시 체계적으로 자세히 토론하겠습니다.
성령의 법과 사망의 법 중에서 양자택일
여러분들에게 두가지 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법을 택하시겠습니까?
항상 죄 짓지 않으려고 나자신을 돌아보면서 십계명을 지키고 성령 훼방죄나 당 짓는 죄, 짐짓 짓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하는 성령의 법을 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칼빈의 예정론처럼 나는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또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어차피 만세전에 택함을 받고 이미 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의 온전함을 지키려고 힘들게 노력할 필요도 없고 살아 생전에 하고 싶은 것도 좀 하면서 인생을 즐기다가 늙으막에 열심히 믿어도 된다는, 만세 전에 택함을 받아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는 나중에 죽기 1초 전이라도 다시 회개시키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인자하신 하나님이 천지창조 전에 예정하셨다는 칼빈의 예정구원론을 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느 구원 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어떠한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그 성도를 구원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참고 사랑과 인내로 버리지 않고 그 성도를 견고하게 붙든다는 칼빈의 예정론.
한번 구원 받으면 계속해서 구원 받는다.
한번 선택된 자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야! 참으로 좋고 신실한 하나님.
물론 칼빈의 예정론이 여러분의 마음에 더 와닿고 마음에 들겠지요.
필자인 나 자신도 칼빈의 예정론이 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고 사랑스럽고
바람직하고 믿음직스럽습니다.
뭐, 일요일에 교회에나 한번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나 한번 하면 신실한 하나님이 자비하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미래에 지을 죄도 지금 다 용서해주시는데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불안하고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닌가?
우리의 바람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칼빈의 예정론처럼 그렇게 안이하고 수월하게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성령의 법은 칼빈의 예정론과는 정반대로 우리 성도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신앙의 온전함을(Integrity)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지 않고 사람들이 만든 법대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은 천국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요 사실이니 어찌합니까?
하나님의 영혼구원에 인간이 무슨 용빼는 수나 재주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는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칼빈이 신앙의 애송이, 27세 젊은 나이였을 때 만들은 이론, 말장난이나 하고 있는 그러한 엉터리 이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취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정론과 정반대가 되는 수많은 구절들과 진리의 이론은 다 무시한 뱀의 거짓말, 예정론.
아래 링크들에는 참고가되는 사이트들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와 병폐(1)_개인구원예정이 있는가?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동영상)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와 병폐(2)_개인구원예정의 사례가 있는가(창25:19-3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동영싱)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와 병폐(3)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며 안전한가?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와 병폐(4) 이중예정과 선택은 과연 성경적인가?(롬10:11-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칼빈의 예정론의 오류와 병폐(5) 성도의 견인교리는 진짜일까?(요6:35-37)
계속해서 네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예정론 비판 1) – 박원근 목사
내 구원은 내가 지키는 것이다. ( 예정론 비판 2) – 박원근 목사
(예정론 비판 3)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인가 – 임마누엘오순절교회(박원근목사)
믿는 성도가 성령을 받을 때는 반드시 방언을 (Spiritual Tongue) 한다.
우리가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의 역사서라고 하는데 아주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많은 구절들에서 믿는 성도가 성령을 받을 때는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불의 혀같은 것이 각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 (행2:2-4).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니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행10:44-46).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뇨 요한의 세례로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2-6).
(행19:6)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막16:16-17)에 믿고 세례를(성령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2).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고전14:22).
위의 구절들을 살펴보니 성령을 받을 때는 반드시 방언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모든 구절들을 특히 사도행전 구절들을 잘 살펴보면 분명 성령이란 절대적인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물리적인 현상으로 역사하시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이와 같이 성령을 받을 때는 물리적인 현상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로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방언을 하며 그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보고 듣는다고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2:33),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로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방언을 하며 그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확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보고 듣는다고 성경에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많은 분들이 당신의 교리는 방언파의 교리냐, 오순절 교회냐 순복음교회냐? 라고 할 것입니다.
방언파도 아니고 오순절파도 아니고 순복음교파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들이 전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 교회입니다.
방언은 성령 받은 표적이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고전14:22).
그러면 구원의 표가 무엇인가?
예, 바로 방언이 성령께서 주시는 구원의 표인 것입니다.
(막16:16-17)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이 구절들에서 방언은 성령세례 받은 성도의 표적이라 하였습니다.
세례는 성령세례이고 새 방언은 하늘나라의 말입니다.
이 구절의 새 방언은 회개기도 하여 죄사함 받고 옛 사람은 죽고 성령을 받은 새 사람(엡4:24),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의 하늘나라 언어를 의미합니다.
성경상에 새(new) 라는 낱말은 영적으로 하늘나라의 것을 의미합니다.
(전1:9-10)에,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죄사함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자신이 (계21:2)의 새 예루살렘 성이 되어서 (계14:3)의 구속함을 입은 십사만 사천인이 되어서 새노래를 즉 새방언으로 하늘나라의 말(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여 지나간 세월 옛사람의 모든 악업에서 돌이켜 새사람이 되어서 회개기도 하고 죄사함 받고 그 증표로 하늘나라의 말인 방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방언을 하는데 그들이 다 하늘나라 방언을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거의 대다수가 하는 방언은 하늘나라의 방언이 아니라 마귀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에 예루살렘성은 의미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실체적인 유대왕국의 수도이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 유대민족, 이스라엘 국가라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세례 받고 이마에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
내가 이마에 인 맞은 자의 수자를 들으니 십사만사천이라 (계7:4).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 (계14:1).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자가 없더라 (계14: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생명과를 전하는 올바른 전도자를 만나서 생명과를 먹고 올바로 배우고 깨달아 해산의 고통을 겪는 회개기도를 하고 그 자신의 그릇을 깨끗이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약속의 성령을(엡1:13) 선물로 받고 그 이마에 구속의인(印, 약속의 성령)을 받으시고 십사만 사천인이 되어(계7:4) 새 노래를 배워서 하나님께 찬양드리는(계14:3)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 노래는 무엇이라 하였지요? 성령의 방언기도라고 앞에서 서술하였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사43:21).
여기서의 144,000 인은 그 구원 받은 무리의 한사람 또는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수량을(quantity)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144,000 이란 숫자는 수학적인 숫자가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들을 다 통털어 집합적인 개념으로 일컫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만약에 그 144,000인이 수량을 의미하는 숫자라면 인류역사상 구원 받은 성도들의 숫자가 144,000 성도들 밖에 안되겠습니까?
아마도 144,000명의 1000배도 넘는 일억 사천 사백 만명도 더 될 것입니다.
(계5:11)에서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하였습니다.
만만은 1억 명을 가리키고 천 천은 백만 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저 사람들이, 거의 모든 기독교 학자들이 해석하는 144,00인이 단순한 수량의 144,000 명이라는 해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납득이 가십니까?
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인은 글자 그대로 143,999+1 하여 144,000명이라는 수량의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 영적 의미가 담긴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 영적 의미를 공개하겠습니다.
1 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숫자, 완전의 숫자, 승리의 숫자를 뜻합니다.
4 는 지상에서의 고난과 역경의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400 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였고 40 년간 광야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10 은 완전의 숫자입니다.
0 은 10 과 같은 의미의 수자로 0 이 많이 거듭 될수록 더 강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144,000 인이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전체적으로 집합적인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언어(言語)에서 일컫는 집합명사와 (Collective Noun) 같은 의미입니다.
144,000은 우리가 지상에서 살 때에 겪는 고난과 고난을 이기고 완전히 승리한 한 명의 사람 또는 그 승리한 모든 사람들의 무리를 집합적인 개념으로 지칭한 것입니다.
4 의 수자가 두번 겹치었으니 계속해서 닥치는 고난들을 믿음과 인내로 다 이긴다는 뜻입니다.
지상에서 모든 고난과 고난을 이기고, 항상 인간의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도 선한 생각이 악한 마음을 이기고 또 이기어 완전 승리한 성도 한 사람 또는 그 승리한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땅 위에서 신앙생활 할 때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인생살이의 시험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참고 인내하며 신앙으로 다 이겨내고 승리하여 천국 가는 승리한 성도 한사람 또는 그 모든 승리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계21:17)의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이 144 규빗이라 하였는데 그 의미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이기고 이기고 승리한 교회, 성도를 뜻합니다.
성벽의 두께가 144 규빗이니 고난과 고난을 이긴 성도의 신앙을 뜻합니다.
벽(wall)은 성경상으로 기독교를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계시록에 나와 있는 숫자는 다 그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러한 감추어진 진리를 모르니 144,000 인이 천국의 지배계급 숫자이다 (여호와증인 해석).
구약시대의 구원 받은 유대인의 숫자이다 (조용기 해석), 현재 지상에서의 구원 받은 성도들의 숫자이다 (한국 토종 사이비 이단들 해석) 하면서 자기들이 지어낸 황당한 거짓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데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저 스스로가 만들어낸 엉터리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가만히 입다물고 있기나 하지 영적으로 한없이 무지한 자들이 거짓말로 떠들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희 같은 종교사기꾼들은 그같은 황당무계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서 144,000 명이라는 수량의 명수을 채워서 자기에게 충성하게 하고 돈과 마음을 다 바치게 하는데 이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이긴자”는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한 생각이 악한 마음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 각 사람이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긴 모든 성도들을 의미하는데,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기가 “이긴자” 이며 보혜사라고, 재림한 예수라고 하는 저질 개그맨 코미디같은 종교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엉성하고 저급한 사기극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옥되어 돈 뺏기고 가정파탄으로 인생 망치는 현상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참으로 이해불능이고 연구대상이고 또 Mystery 합니다.
그러한 저속하고도 추악한 어처구니 없는 종교 사기꾼, 영적 사기꾼들에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자기 생활을 전폐하고 충성하는 현상은 왜 일어나고 있는지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토종 사이비 이단들이 144,000명의 거짓 이론을 가지고 수많은 우매한 영혼들을 속여서 후리고 있습니다.
그 144,000명의 ‘아이디어’는 여호와 증인에게서 배우서 써먹고 있습니다.
불세례의 영적 의미
또 그러다 보니 어떤 분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이 땅위에서 만사형통 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지상의 고난이라는 것이 있는가?
우리가 지상에서 복 받고 범사에 형통하려고 예수 믿는 것 아닌가?
당연히 그런 맛이 있어야 예수를 믿는 마음이 생기고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지.
아니 그렇습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마3:11)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 실 것이요.
(눅3:16)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것이요.
이 구절들에서 보면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불세례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눅12:49)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고전3:13,15)에,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벧전4:12)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계3:18)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예수께서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불시험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성도들에게 오는 시험이고 고난인데 그 모든 시험과 지상의 고난을 다 참고 인내하며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때도 있고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성도들을 유혹하고 흔드는 시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과 죄를 범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이 싸워서 선한 마음이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악하고 미련한 생각과 유혹을 이기고 나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롬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계2: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2:11),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계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순복음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으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만사형통하기만 하고 불시험과 고난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불세례’가 무엇인지 모르니 불세례도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니 좋은 것인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들이 불세례가 무엇인지 모르니 쩍하면 말하기를 “불같은 믿음을 달라고 “ 하고 “제단의 불을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불이란 성경에 주로 나쁜 의미를 상징합니다.
불이란 하나님의 진노. 벌, 응징, 시험, 고난, 역경을 영적으로 의미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믿는 성도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고난과 시험인데 일부러 고난을 자초하여 사서 고생을 겪을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눈뜬 장님들이고 무식한자들, 그러니 (사29:11)에서 무식한 자에게 주며 성경을 읽으라고 하니 나는 무식해서 해석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시험과 고난이 안따른다면 (계7:17, 21:4)에서의 144,000인 성도들에게서 눈물이 나올 일이 없고 하나님 그 눈물을 닦아주실 일이 없습니다.
고난도 없이 항상 형통하고 무사태평인 신자들인데 무슨 눈물이 나오겠습니까?
순복음교회에서 가르치듯이 천국은 따논 당상이고 지상에서 복 받아 돈 잘 벌고 만사형통 한다면 성도들의 눈에서 무슨 눈물이 나올 일이 있으며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겠습니까?
발람과 같은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운 더러운 영이 가득한 거짓 목자, 탐욕의 늙은 뱀 조 용기 목사.
기복신앙으로 수많은 신자들의 돈을 후리는 가증한 바벨론의 상고, 무수한 신자들을 삼키는 용 느부갓네살 (렘51:34).
지구는 인생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연단의 장소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이 지구는 인생들이 천국으로 가기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연단의 장소입니다.
사람의 수명 연수가 80년 이라 한다면 그 기간 동안 겪는 지상에서의 모든 시험과 고난과 좌절을 다 극복하고 이겨내야만 천국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천국에 가는 입학시험에 통과하려면 성경을 교과서로 철저히 학습해야 하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대로 열심히 준행하며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괴롭고 힘든 고난의 80년의 세월을 이겨내면 그 후에 오는 세계는 영생복락의 영원한 무한대의 시간이 지속되므로 우리 성도들은 인내해야 합니다.
(고전3:13,15),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위의 구절에서 공력이 불에 타면 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령 받은 성도가 불시험에 이기지 못하고 지면 많은 세월 쌓아 온 믿음의 노력과 신앙생활의 공력(功力)이 다 무너지고 사라져 해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의미는 시험과 고난을 인내하고 이기지 못한 성도들은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뜻입니다.
공력이란 각 성도가 그동안 쌓아 왔던 믿음과 노력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믿음의 행적을 예수님께서 불세례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욥처럼 불세례의 시험을 이겨내면 행복한 종말과 상을 받으나 그 불에 타면 해를 받고 (겔18:24)의 내용과 같이 그동안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고 그간의 모든 노력과 공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3:11)에 예수께서 때때로 성도들에게 주시는 불세례 시험을 욥처럼 견디고 이겨내야 좋은 결말이 옵니다.
그러한 불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죄악 세상으로 나가면 해를 받고 구원에서 탈락하는 것입니다.
(욥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48:10),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슥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롬5:3-5),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18)에서 말하기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모세는 (시90:10)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야고보 감독은 (약4:14)에서 말하기를,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와 같은 연단의 불세례 시험에서 견디지 못하여 구원에서 추락하는 성도들을 영적 비밀로 잘 묘사한 성경구절이 (계 6장 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의 별들은 성령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설익은 열매들, 즉 덜 익은 과일들이(성도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대풍의 불세례를 이기지 못하고 믿음의 온전함에서 분리되어 죄악세상으로 떨어진다는 영적 의미입니다.
지구의 자연법칙은 큰 바람이 불어 한 나무가 흔들리면 잘 익은 열매들이 먼저 떨어지고 아직 익지 않은 설익은 열매들은 잘 떨어지지가 않고 나무가지에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잘 익은 과일들은 과일에 붙어 있는 가지가 마르고 약하여 져서 바람에 흔들려 쉽게 나무에서 떨어져 땅으로 추락합니다.
그러나 설익은 과일들은 나무와 연결된 가지들이 오히려 굵고 단단하여 왠만해서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6:13)에서는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설익은 과일들만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7 인으로 봉한 감추어진 영적 비밀의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 했으니 (눅3:16) 예수께서 생명의 성령도 주시지만 주기적으로 성령 받은 성도들을 시험하는 불세례를 주십니다.
“열매가 잘 익었다”는 것은 신앙이 성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설익었다는 것은 신앙이 미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잘 익은 열매들은 진리의 지식에 통달하고 믿음이 장성하여 인격과 신격이 형성되어 있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9가지 열매가 (갈5:22-23) 잘 익은 성도들로서 그러한 불세례가 성도들에게 주어질 때에 그 힘들고 괴로운 시험들을 잘 견디고 시험들이 지나갈 때 까지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며 신앙의 온전함을(Integrity) 잘 지키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서 그 가지가 끊어져 분리 되지 않고 살아남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잘 익은 열매들은 세상의 탐욕과 음욕의 유혹들도 다 뿌리치고 믿음의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깊이가 없고 진리지식에 덜 숙달이 되어 신격과 인격이 덜 자란 성도들은 설익은 과일이라서 때때로 찾아오는 대풍의 불세례를 이기지 못하고 신앙의 본체에서 그 가지가 끊어지어 땅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설익은 열매들은 시험이 찾아올 때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문을 갖기도 하고 불세례로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행복과 형통함을 주시지 않고 반대로 고난과 좌절을 주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세상의 인간적인 탐욕과 음욕의 유혹의 시험을 뿌리치지 못하고 성경진리의 믿음에서 떠나는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불세례를 이기지 못하는 심지가 약한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불세례를 주어 괴롭게 하여 믿음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하나님을 불신실하다고 생각하여 그런 사랑 없는 하나님은 안믿겠다고 하고 그러한 비상식적인 사도복음의 교리는 싫다하여 쉽고 사랑과 관용이 넘치는 칼빈의 예정론을 주장하는 일반 바벨론 기성교회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고진감내(苦盡甘來)라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다 이기고 나면 달콤한 행복과 보상이 옵니다.
그렇게 시험을 다 이기고 인내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복을 여러배 주시고 나중에는 영생복락의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욥42: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롬8:18)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와 같은 감추어진 영적 비밀의 의미를 진리로 해석하는 사람이 사도복음의 진리 외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바알에게 무릅꿇지 않은 7000인
(왕상19:18, 롬11:4)의 바알에게 무릅 꿇지 않은 7000인도 마찬가지로 수량을 의미하는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7 이란 영적으로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라는 것을 일반 일요일교회에서도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데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10 도 완전이고 0도 완전을 의미하니 7000인이란 6999+1=7000이명이란 수량의 뜻이 아니라 완전을 세번 강조한 절대 완전(Absolute perfect)을 영적으로 의미합니다.
완전한 순종, 완전한 의, 완전한 신앙을 의미하며 개개인의 완전한 한 사람의 성도 또는 완전한 모든 성도를 집합적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왕상19:10)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이 대답하시기를 (왕상19:18)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온 세계의 기독교가 바알신 숭배로 더렵혀져 있고 엘리아 시대처럼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을 태양신 숭배하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다 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알에게 무릅 꿇지 아니하고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7000 인이 세상 어디에는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가증한 현상들을 보고 탄식하고 우는(겔9:4) 사람, 성경의 진리를 알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일요일 숭배에 회의를 느끼고 십계명을 올바로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바알에게 무릅 꿇지 않는 7000인 입니다.
그러한 가증한 거짓 교리에 자기의 영혼을 내어 맡기지 않고 일요일에 예배당에 나가서 태양신에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않은 7000인 입니다.
성경에서 입을 맞추다는 의미는 영혼의 교류를 의미하는데 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코로 숨을 쉬는데 영적으로 숨(breath)은 영(spirit)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breath는 성령이고 (창1:7, 겔37:9-10, 요20:22) 사람의 breath는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급하신 그 7000인이란 실제로 (왕상18:3-4)에서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가 하나님의 선지자 100인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여서 아합의 학살하는 손에서 살려낸 선지자 100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0 은 완전한 수자를 의미하는데 아브라함도 100 세에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창21:5).
이삭은 (갈4:28)의 약속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성도를 의미하는데 아브라함의 신앙이 완전하였을 때에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 65:20)에서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라고 한 것입니다.
7000 = 100 = 완전한 신앙의 완전한 성도.
.
하나님은 우리들이 완전한 성도들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신18:1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영역-perfect).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레19:2),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1: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성령 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표적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나타나는 표적이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막16:16-18).
사도행전을 잘 살펴 보아도 성령이 그 세례 받는 자에게 강림할 때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 따랐지요? (행2:2-4, 행2:33, 행10:44-46, 행19:2-6).
무슨 표적일까오?
바로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 spiritual tongue, 하늘나라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래에는 방언의 역사 Web Link
방언, spiritual rongue방언 (Glossolalia)서기 1900년에 다시 시작한 방언의 역사 Weblink
여호와증인이나 안식일교회나 워치만니교회나 신천지교회나 그 외 여러 기독교 보수 교파들도 장로교회도 감리교회도 성령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니 저희들끼리 모여서 허탄한 풍설(출23:1)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면서 (엡4:14).
성령이 밝히 말씀 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쫒으리라 하셨으니 (딤전4:1).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사도들)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는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복음에서 떠나 바리새인들의 거짓 가르침에 귀가 솔깃하여 모두들 진리를 버리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말은 것입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의 입, 하나님의 입, 사도들의 입을 여러 구절 언급하며 입이라는 단어에 큰 영적비밀이 있다 하였지요?
입이란 영적으로 문(門)이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 들어가야 하고 예수께서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시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7:13)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입으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이 구절에서 먹는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앞장에서 말했듯이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고 했지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10:9).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30).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시24:7,9).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12:7).
모세가 회막에 들어 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33:9-11).
이와 같이 입에서, 문에서 역사를 하시는데 어느 분이 역사를 하시는지 아십니까?
바로 성령께서 역사를 하시는데 사람의 입에서 역사를 하십니다.
조금 지능이 혹 영적으로 발달된 분들은 입에서 행하는 성령의 역사가 무엇 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답이 전혀 상상도 못 하는 구절에 있습니다.
(사6:4)에,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은 숨기어져 있고 봉하여져 있는 것입니다.
과연 문지방 터가 요동하는 것은 어떠한 현상이며 왜 문지방 터가 요동하였습니까?
예, 창화하는 소리로 인하여 요동하였지요?
창화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예, 찬양하는 소리를 말하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43:21).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였다는 것은 성령세례 받은 성도의 입에서 하늘나라 언어인 방언이 발파되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늘나라의 언어인 방언의 영기도(靈祈禱)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14:2-3).
새 노래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시40:3).
새 노래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바로 방언의 영기도를 가리킵니다.
하늘나라의 말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널리 알려진 바와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였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사43:21).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시40:3).
성령 받은 표, 방언의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21:2).
성경안의 낱말 중 새(New)라는 형용사는 영적 의미로 하늘나라의 것이라는 축자영감 해석을 앞에서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법은;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3:5).
• 우리 인생들이 영혼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 받은 성도는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소멸하게 하면 안된다 (살전5:19).
• 성령 받은 성도는 자신이 영원구원에서 버림받지 않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끊임없이 인격수양하면서 연단하여 스스로 심령을 정결하게 하게 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 성령 받은 성도는 반드시 십계명을 지켜야 하고 (마19:17) 사함 못 받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 영원히 사함을 못 받는 죄는 성령 모독죄 (막3:29), 당을 짓고 적 그리스도가 되는 죄 (요일2:18- 19), 짐짓 진 죄이다 (히10:26).
영원히 사함 못받는 죄를 범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원에서 영원히 탈락된다 (히6:6).
그 사람에게는 살아 생전에 영혼구원의 두번째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으며 사후에도 없다.
• 성도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갈5:22-24) 맺어야 한다.
성령 받은 성도는 의인이므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 때때로 성도에게 찾아오는 불세례를 이겨내고 신앙의 온전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항상 기도하며 성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해야 한다 (약2:17, 26).
성령 받은 성도는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지상에서의 삶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
여러분,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모든 악하고 미련한 사람의 생각과 유혹, 때때로 찾아오는 모든 불시험과 지상의 고난을 다 이기고 승리하여 이마에 하나님의 구원의 인침을 받은 십사만사천인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할 때는 수금과 비파와 퉁소로 찬양을 하였는데 신약시대에는 회개하여 성령 받고 새 노래로 새 방언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제 5 장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



